내가 황지우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의 해설을 보면 좋을 것 같다.
매스컴은 反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어떻게 보면 좀 무정할 정도로 정직한 의사소통의 전형인 문학은 따라서, 진실을 알려야 할 상황을 無化시키고 있는 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抗體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 못 하게 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것에의 도전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까? 어떻게 침묵에 사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시에서, 말하는 양식의 파괴와 파괴된 이 양식을 보여 주는 새로운 효과의 창출을 통해 이 침묵에 접근하고 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信號] 가운데
도서관에서 황지우의 시집을 검색해보니, 다들 과제 때문인지 빌려가고 한 권이 남아있었다. 1983년 초판이 발행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였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황지우의 대표적 시집이다.
유명한 시집이니만큼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만한 시들이 실렸으리라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시집의 앞부분에 위치한 몇몇 시들만이 눈을 편안히 할 뿐, 뒤로 갈수록 그 파격적임에 내 뒤통수가 시원해졌다.
이 시집을 읽고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난해하다.’ ‘현실풍자적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앞에서 시인이 설명한 대로 양식의 파괴, 또 파괴의 양식화이다. 눈에 익숙하지 않으니 난해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양식을 파괴하지 않으면 표현하기 힘든 메시지들이 숨어있다.
가령,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의 경우, 송일환 씨의 그 날 용돈기입장이 적혀있다. 한국일보를 130원에 샀다. 신문기사를 읽는데, 내용이 한 줄씩 빠져 이상하다. 송일환 씨가 이 기사를 띄엄띄엄 읽었음을 표현하는 황지우의 형식 파괴이다. 기사는 표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준 청과물상 이야기이다. 송일환 씨는 이 기사엔 관심이 없나 보다. 독자는 파괴된 형식을 통해 철저히 송일환 씨의 눈이 될 수 있다.
또한 황지우의 시는 풍자시가 많다. 같은 시를 보자면, 기사 아래에 비싼 보물들의 리스트가 눈에 띈다. 누락된 곳이 없으므로 송일환 씨는 꽤 꼼꼼히 살펴봤나 보다. 교과서적인 착한 기사는 재미없고, 화려한 것은 자극적이다. 그의 시는, 이처럼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척하면서, 그것을 해석하는 해석자의 세계관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日出’이라는 한자를 찬, 찬, 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에서는 각종 기호를 사용하며 형식을 파괴하고,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에서는 두 연의 대립을 통해 풍자시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다. 잔인하도록 예리한 표현을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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