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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카테고리/[詩산책]

[詩산책] 인연설 - 한용운

인연설1 – 한용운

 

진정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어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그 사람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가다가 달려오면

잡아달란 증거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울면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용운의 시는 참 읽기 쉽다. 그냥 읽으면 바로 이해가 되는 정도이다. 그래서 오히려 한 장 정도의 감상평을 쓰기에는 힘든 시들이 많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는 이상의 난해한 시들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른다.

사실 한용운의 인연설은 정확히 어떤 시이다! 하고 선이 그어진 시가 아니다. 보통 한용운의 인연설 하면 잘 알려진 시가,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란 문구로 시작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 나는 당신을 오래 사랑하렵니다라고 끝을 맺는 시이다. 이 시는 인연설의 2편에 해당하며, 필자가 위에 적은 시는 그 중 1편에 속한다. 이것이 3개의 시의 연작시인지, 아니면 원래 하나의 시인데 적당히 잘라놓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용이 연결되는 점이 있다는 것은, 이 시들을 하나로 엮어놓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시의 큰 맥락은 결국 하나이다. 사랑, 특히 이별하는 순간의 사랑은 아이러니 그 자체라는 것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고, 잊고 싶을 땐 잊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인연의 전부일까? 과연 설()이라는 말을 써도 될 만큼 이 시가 인연에 대한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가? 난 아니라고 본다. 그럼 결국 인연설2 3을 다 봐야지만 좀 이해가 될 듯싶다.

 

인연설2 –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 원망치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인연설3 – 한용운

 

세상 사람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눈이 너무 어둡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스스로 우스워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먼 먼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가까운 것은 벌써 가까운 것이 아니며

멀다는 것 또한 먼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가까운 것은 먼 곳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먼 곳도 가까운 것도 아닌

영원한 가까움인 줄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정작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사를 한다는 것은 벌써 인사가 아닙니다.

참으로 인사를 하고 싶을 땐 인사를 못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더 큰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앞에선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땐 잊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뒤돌아 보지 않는 것은 너무도 헤어지기 싫은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인연설3 1과 다소 겹치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좀 더 같은 말을 풀어서 쓴 느낌이 든다.

아하! 결국 인연설1의 아이러니는 같은 것에 대한 아이러니가 아니었다.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에 숨겨진 것의 다름일 뿐이었다. 그리고 인연설2에서는, 아이러니를 사랑이라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배제하고, 속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결혼식에 주례선생님이 할 만한 말이다.


2010. 12. 9. / 카이스트에서... (http://김철성.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