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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산책]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그릇 39) – 오세영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그릇 39) – 오세영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 , , , …

글자를 뿌리듯

신은 밤하늘에

별들을 뿌린다.

빈 공간은 왜 두려운 것일까,

절대의 허무를

빛으로 메꾸려는 저, 신의

공간,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씀으로 채우려 한다.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 , , , … 글자를 뿌릴 때

지상에 떨어지는 씨앗들은

꽃이 되고 풀이 되고 또

나무가 되지만

언제인가 그들 또한

빈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나와 너의 먼 거리에서

유성의 불꽃으로 소멸하는

언어,

빛이 있으므로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빛과 어둠


꽃다운 나이 20살에, 나의 룸메는 가수 김광석의 팬이었다. 방에서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보면, 어깨 너머로 김광석의 목소리가 흘러 내 귓가로 스며들곤 했다. 처음 귀로 접한 그의 이미지는 결코 가창력이 좋은 가수는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떨렸는데, 그 떨림은 소몰이 창법과 같은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떠는 목소리가 아닌, 말 그대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환자의 신음소리처럼, 자연스레 터져나오는 또 하나의 표정이었다. 그는 무언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게 된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그렇게, 20살내기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게 되었다. 방문자 수는 절반으로 줄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20살의 나는 고뇌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대학생활이 한 바퀴를 공전해 궤도에 오른 상태였으니, 분명 많은 것들을 채워가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속은 반대로 갈증과 허전함을 느꼈다. 항상 자신감 있게 소리쳤지만, 그럴수록 목은 더욱 바싹 타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성대는 힘없이 떨렸다. 이것은 그의 떨림과 같은 느낌이었다. 가슴 속을 채우지 못해 허전해하고, 반복되는 허전함이 고여 두려움을 만들었다. 그는 분명 나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후로 혼자서 노래방을 찾아가는 일도 잦아졌다. 우울한 기분일 때 많은 이들은 신나는 노래를 불러 기분을 풀지만, 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즐겼다. 방에 들어가서, 김광석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예약해 반주도 놓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불렀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노래는 일종의 술과 같았다. 평소엔 초콜릿과 과일주스가 가장 달콤하지만, 속이 허전할 때 달콤함을 채우는 것은 술만한 것이 없었다. 그의 노래는 유일하게 날 취하게 했고, 포만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허나 그렇게 채워진 가슴은 오래가지 못했다. 술로 채워진 배는 다음날 게워내야 한다. 알코올 섞인 물배를 채우는 것은 환영에 불과하지, 진정한 포만은 아니었다. 김광석의 노래는 나를 대변해줄 수 있지만, 해결해주지는 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허전함을 메울 수 있을까? 대학생활의 대부분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방황의 연속이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봉사를 하며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사랑을 하면 채워질까 싶어 연애도 많이 해보았다. 방학 때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돈도 모아보았다. 휴학계를 제출하고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비웠던 곳이 하나 둘 메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의 활동들로 내 속을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도, 여전히 공간을 간직한 채 채워짐을 거부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허전함은 20살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끝내 채워지지 않는 것. ,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인간 근원의 고독이리라. 자가진단을 마친 순간 나는 그 공간을 채우기를 중단하였다. 그리고 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해결하지 못하는 고독이라도 존재의 이유는 존재하리라. 근원적 고독은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검색도 하고, 책도 찾아보았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정리한 논리들을 살펴볼 수 있었지만, 채우는 방법이 존재하는 비근원적 허전함에 관한 내용이 대다수였다.

이러던 차에 이 시를 접하게 된 건 행운이었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흥미로웠다. ‘빛이 있으므로 신의 하들에도 어둠은 있다.’ 이 문구는 나에게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빛은 밝다. 밝기라는 것은 그 크기가 존재하는 measure이고, 그 값이 0이 되는 순간 어둠이 된다. , 어둠은 밝기의 출발점이므로,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관계가 우리에게 익숙한 까닭은, 어둠을 절망에, 빛을 희망에 비유하여 희망적인 메시지로 가끔 쓰이는 탓이다.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절망하는 이에게, 우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위로하곤 한다. 이렇게 희망은 흔히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같이 절망 속에서 싹트는 존재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어둠과 절망이 없다면 빛과 희망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수학과를 나온 내가 왜 저 마지막 문구에서 빛이 있으므로 어둠도 있다란 명제를 도출해내지 못했을까. 진흙탕이 없다면 연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말로 연꽃이 존재하는 곳엔 진흙탕이 있다는 뜻인데 말이다. 고독은 공허이고, 어둠이고, 두려움이다. 따라서 위의 문구를 통해 그 동안 찾아 헤매던 고독의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빛이 존재하기에 어둠도 존재한다. 음양으로 치면 어둠은 음이고 빛은 양이다. 흔히 자아와 반대되는 것은 자아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데, 음양의 논리를 투영하면 나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각각 음과 양 중 하나씩을 차지한다. 이 때 빛이란 어둠을 제외한 모든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 , 어둠이 곧 고독이라면, 고독은 고독을 제외한 모든 것이 존재하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수 천년 동안 동양을 지배해 온 관계의 철학과 무관치 않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 아니로다.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유명한 성철스님의 계송은 음양설로 해석해볼 수 있다. 산과 물은 자연 속에서 어우러져 전체집합을 이루는 존재들이다. 곧 자연에서 산이란 물을 제외한 전부이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물은 산을 타고 흐르므로 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산은 물이 있어야 그 속에서 살아있음이 숨쉴 수 있다.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 음과 양은 서로의 품 안에서 탄생하고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선, 그 전에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어야 한다. ,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이다.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비유하자면, 장자는 꿈 속에서 더 이상 장자가 아니다. 꿈을 꾸기 전의 장자는 꿈에서 깨어난 장자와 현상적으로 동일하나, 의식적으로 변화하였다. 자신의 부정을 통하여 다른 것에 몰입하고 편견 없이 만물을 제대로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을 깨우친 후에는 현상적으로 같은 것을 보더라도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그 동안 해답을 찾지 못해 헤매고 다녔던 것은 어둠 속에 매몰되어 어둠을 분석했기 때문이다. 어둠을 알려면 빛을 보아야 한다. 그 동안의 고독을 이해하려면 우선 고독을 탈피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각하라는 한 연애전문가의 조언이 떠오른다.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 이를 테면 그 사람의 성격, 관심사, 연애관, 음식취향 등을 생각하고 챙기다 보면 결국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시에서 신은 절대 허무를 빛으로 메우고, 시인은 원고지에 언어를 뿌린다. 빈 공간이 두려워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채움은 결코 절대 포만이 아니다. 언어는 생성되고 변화하지만 결국 빈 공간으로 되돌아가고, 빛은 한번 지난 자리는 다시 들르지 않는다. 결국 일시적인 개체로 공간을 채우기 위해선 지속적인 작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끊임없이 채워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이 어둠이고 고독인 것이다. 모든 의식은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다고 가정했을 때, 의식적으로 나의 어둠을 메우려면 결국 지속적으로 채우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아하, 끊임없이 공부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며, 끊임없이 채워나가라! 빛을 파악하니 어둠이 쾌히 밝아진다.


2010. 12. 27. / 어은동에서... (http://김철성.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