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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산책] 내 만일 – 강은교

 

 

내 만일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히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사랑하는 마음뿐으로

그리운 마음뿐으로

 

그런데 그대여

오늘밤은 참 깊구나.

질기기도 하구나.

 

기다려다오.

기다려다오.


그리움은 지우려 할수록……


재미있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일본의 한 연구소가 사람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장소는 어디가 제일 많을까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복수응답)한 결과에 따르면, ‘침대 위에서 51%, ‘걸으면서 46%, ‘차 안에서 45%으로 각각 1,2,3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과거 중국 북송의 유학자인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데, 문장을 생각하기 좋은 장소로 마상(馬上, 말을 타고서), 침상(枕上, 자리에 누워서), 측상(厠上, 변소에서) 3상을 지목했다 한다. 3상의 공통점은 홀로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특히 침상에서 생각이 많은 편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온갖 잡념들이 떠올라, 사라지기 전에 붙잡기 위해 불을 켰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침상은, 하루 종일 관계들 사이의 교차점으로서 존재하던 인간이, 몸에 걸쳐진 모든 거미줄들을 뜯어내고 비로소 홀로 존재하는 상태이다. 무언가를 뜯어내는 과정은 항상 홀가분함과 허전함의 감정을 동시에 가져온다. 숨통이 막혀 당장 벗고 싶던 실타래들을 벗어 던지고 자유가 찾아오면, 온몸의 허전함이 문득 섬뜩해져 얼른 다시 거미줄을 둘러맬 새벽을 기다린다. 인간이기에 짬뽕과 자장면 사이에서 방황하는 법이다.

그런데 자장면은 누군가와 함께 기다렸는데, 짬뽕은 나 홀로 기다려야 한다면, 어느 것이 더 힘든 여정일까? 침상은 그런 곳이다. 뱃가죽이 등에 붙었을 때, 따끈한 짬뽕국물을 홀로 상상하지만 삼킬 침조차 말라버린, 그런 시간이다. 먹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배고픔을 움켜쥐고 잠들려 노력해 본 적, 다들 있을 것이다. 아래에선 꼬르륵 소리가, 위에선 탕수육이 맴돈다. 에잇, 잠이나 자자, 생각하고 휙 돌아누우면, 아뿔싸, 탕수육 짜리가 자가 된다. 지우려 할수록 탕수육은 계속해서 커지고 불어난다. , 결국 오늘도 지갑을 꺼내 든다.

그리움은 지우려 할수록 눈덩이처럼 커진다.

글의 분위기를 조금 바꾸어보자.

밤은 깊고 오늘도 어김없이 이불 속에 몸을 뉘이지만, 사랑하는 꽃분이는 이미 꿈나라에 가 있다. 이 순간 나는 철저히 혼자다. 혼자이기에 생각하기 좋고, 혼자이기에 꽃분이가 그립다. 그러다 보니 그리움을 생각한다. 눈을 감는다. 가을 바람을 타고 흘러 꽃분이네 방 창가에 걸터앉는다. 새근새근 숨소리는 들리지만, 창문은 닫혀있다. 어떡하지?

폭풍이 되어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그래서 꽃분이 가슴 깊숙히 내 숨결 불어넣는다. 안개가 되어 대들보 녹이고 꽃분이 피에 내 피 맞대어본다. 종소리 되어 저 벽 너머 하느님네 말씀 전해주고 그래서 꽃분이 웃음 기어코 만나본다.

한기를 느껴 정신을 차려보니 아직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 꿈이었구나. 내 만일 정녕 그것들이었다면, 그렇게 그대를 느꼈을 텐데……

내 만일 그랬다면, 그랬을 텐데……

춥다. 방으로 돌아가자. 매미들아. 아직 그 혼령이 귀천하지 않았거든, 울어다오. 사랑하는 마음뿐으로, 그리운 마음뿐으로, 7년의 세월을 인고한 너는 날 위해 소리쳐다오. 진짜 그리움은 이런 것이라며, 마지막 사랑노래로 날 강하게 킥(kick)해다오.

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매미소리가 아닌, 여자친구와 화상대화하며 흐뭇해하는 룸메이트의 웃음소리였다. 하이고, 오늘 밤은 참 깊고 질기겠구나.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그리고 그리움은 지우려 할수록 눈덩이처럼 커진다.

2010.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