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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산책] 천생연분 - 박노해

 

 

천생연분 - 박노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서가 아니다

이쁜 걸로야 TV탈렌트 따를 수 없고

세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 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 차고

써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꽂꽂이야 학원강사 따르것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며칠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 걱정 일 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쎄일샤쓰 하나 못 사도

짜장면 외식 한 번 못하고 로션 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면 당신이 무데기로 동료들을 몰고 와

피곤해 지친 나는 주방장이 되어도

요즘 들어 빨래, 연탄갈이, 김치까지

내 몫이 되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

 

조금만 나태하거나 불성실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진짜 겁나는 당신

좌절하고 지치면 따스한 포옹으로

생명력을 일깨 세우는 당신

나는 쬐끄만 당신 몸 어디에서

그 큰 사랑이, 끝없는 생명력이 나오는가

곤히 잠든 당신 가슴을 열어 보다 멍청하게 웃는다

 

못 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을 일어서 만난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억압 속에 시들은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숙명을

당신과 나는 사랑으로 까부수고

밤하늘 별처럼

흐르는 시내처럼

들의 꽃처럼

소곤소곤 평화롭게 살아갈 날을 위하여

우린 결말도 못 보고 눈감을지 몰라

저 거친 발굽 아래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 지르고 휩쓸려갈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기쁨으로 산다 이 길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눈물나게 좋다 여보야

 

도중에 깨진다 해도

우리 속에 살아나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른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삼천리 방방곡곡 흐드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맞추며 옛얘기 나누며

일찍이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윽한 눈물로 지자 여보야

나는 당신이 좋다

듬직한 동지며 연인인 당신을

이 세상에서 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미치게 좋다



지게 사랑하기에 인간이다


문화사적으로, 인간과 여타 동물들과 달리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음은 직립보행을 하기 때문도, 불을 사용하기 때문도 아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노동을 하기에 인간이다. 인간다움은 노동을 통해 우리네 역사에 등장하였고, 수많은 이들의 사색과 노력으로 인간문명의 진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던 노동은 점차 본분을 상실한 채, 근대 이후 인간소외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왔다. 모순이 넘쳐나는 게 모더니즘이라지만, 노동하기에 인간이고 또한 인간답기 어려운 이 놈의 시대는 참으로 불안정하다.

이러한 모순이 극에 달했을 때 등장한 노동해방시인 박노해는, 어쩌면 시대를 거슬러올라 태초의 원초적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한 80년대 한국사회의 축복받은 선물일 것이다. 그는 처절한 노동현장 속에서 사람냄새를 노래했다. 이 땅의 노동자에겐 지문이 없고(<지문을 부른다>), 잘려나간 손목은 있다(<손 무덤>). 시다는 미싱을 통해 갈라진 세상 연결하길 꿈꾸고(<시다의 꿈>), 노동자의 햇새벽을 꿈꾸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노동의 새벽>).

처절한 삶의 노래 속에서, <천생연분>이란 시가 내 뇌리에 꽂힌 것은 아마 인간은 사랑하기에 또한 인간이라는 철학 때문이리라. 모든 사람은 사랑 주고 받아본다. 나도 그러했고 노동자도 그러했다.

이 바깥양반, 도대체 무드라곤 찾을 수 없다. 마누라가 오지게 좋고 겁나게 좋단다. 째지게 좋고 눈물 나게 좋고 미치게 좋단다. 자존심도 엄청 긁는다. 탤런트보다 못생겼고 종로여자, 여대생년들이 더 낫단다. 이쯤 되면 마누라가 한바탕 하자고 팔 걷어붙이고 덤벼들 일이다. 근데 난 이게 왜이리 사랑스러울까.

많은 남정네들이 가끔 착각하는 것이, 사랑에서 사실 중요한 건 폼 잡는 것보다 진심을 보이는 것이다. 노동자의 사랑은 투박하지만 투명하다. ‘장미꽃? 그게 뭐여. 먹는 건감? 그냥 나는 마누라가 오지게 좋을 뿐.’ 그 큰 사랑이 어디서 나올까 궁금해 곤히 잠든 아내의 가슴을 열어볼 땐 아이 같은 순수함마저 묻어 나온다.

못 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만나 인간소외라는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숙명을’ ‘사랑으로 까부수고산다는 것,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 지르고 휩쓸려갈지라도 기쁨으로 산다는 것은, 단지 사랑하며 인간답게 살고픈 우리네 소박한 희망이다.

앞서 배운 김용택 시인의 시에서 쌀값도 우리가 정하자는 표현이 투박하면서도 정감이 갔듯이,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자는 표현도 상상 속에서 참으로 아름답다. 이런 사랑 죽기 전에 할 수 있기에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다. 여건이 좋으면 좋은 거고, 안 좋으면 또 어떠랴. 사랑의 아름다움은 환경에 비례하지 않는 법이다.

모두 사랑하라. 오지게 사랑하고 겁나게 사랑하라.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은’, 그런 사람 만나 벅찬 감동을 느끼고, 비로소 내가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 하나 알아가며 인간이 되자.

 

2010.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