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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詩산책] 약속 없는 세대 – 장정일 약속 없는 세대 – 장정일 우리들은 약속 없이 만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언제나 약속을 하고서야 만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이미 약속 없이 만날 수 있는 영감이 사라진 지 오래니까, 하므로 우리에게 약속 없이 만나는 갑작스런 기쁨이 선사되는 일이라곤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체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하기나 했다는 걸까. 우리들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고, 우연히 극장에서 만났는데, 그리고 디스코 텍과 맥주 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또, 한잔 더 하기 위해 찾아들어간 포장집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래, 이런 일들이 정말 어떤 약속하에 이루어진 것일까, 정말 어떤 약속하에? – 믿기는 어렵다. 우리들이 만나기 위해 더는 약속이 필요치 않다. 우리들은 약속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예민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티 브이.. 더보기
[詩산책] 내 만일 – 강은교 내 만일 –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히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사랑하는 마음뿐으로 그리운 마음뿐으로 그런데 그대여 오늘밤은 참 깊구나. 질기기도 하구나. 기다려다오. 기다려다오. 그리움은 지우려 .. 더보기
[詩산책] 천생연분 - 박노해 천생연분 - 박노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서가 아니다 이쁜 걸로야 TV탈렌트 따를 수 없고 세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 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 차고 써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꽂꽂이야 학원강사 따르것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며칠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 걱정 일 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쎄일샤쓰 하나 못 사도 짜장면 외식 한 번 못하고 로션 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 더보기
[詩산책] 한국생명보혐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 내가 황지우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의 해설을 보면 좋을 것 같다. 매스컴은 反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어떻게 보면 좀 무정할 정도로 정직한 의사소통의 전형인 문학은 따라서, 진실을 알려야 할 상황을 無化시키고 있는 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抗體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 못 하게 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것에의 도전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까? 어떻게 침묵에 사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시에서, 말하는 양식의 파괴와 파괴된.. 더보기
[詩산책]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그릇 39) – 오세영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그릇 39) – 오세영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ㄱ, ㄴ, ㄷ, ㄹ, … 글자를 뿌리듯 신은 밤하늘에 별들을 뿌린다. 빈 공간은 왜 두려운 것일까, 절대의 허무를 빛으로 메꾸려는 저, 신의 공간,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씀으로 채우려 한다.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ㄱ, ㄴ, ㄷ, ㄹ, … 글자를 뿌릴 때 지상에 떨어지는 씨앗들은 꽃이 되고 풀이 되고 또 나무가 되지만 언제인가 그들 또한 빈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나와 너의 먼 거리에서 유성의 불꽃으로 소멸하는 언어, 빛이 있으므로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빛과 어둠 꽃다운 나이 20살에, 나의 룸메는 가수 故 김광석의 팬이었다. 방에서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보면, 어깨 너머로 김광석의 목소리가 흘러 내 귓가로 스며들곤 했다... 더보기
[詩산책] 인연설 - 한용운 인연설1 – 한용운 진정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어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그 사람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가다가 달려오면 잡아달란 증거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울면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용운의 시는 참 읽기 쉽다. 그냥 읽으면 바로 이해가.. 더보기
[詩산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0. 필자는 학교와 집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계로 거의 분기마다 한 번씩 가족들을 만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럴 땐 보통 집안 행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 주말에는 서울에서 삼촌뻘 되는 친척의 결혼식이 열렸다. 새신랑이 가까운 친척이라 동해바다를 지척에 둔 고향의 친척들도 모두 올라갔다. 거리가 먼 관계로 친척들은 결혼식 전날.. 더보기
[詩산책] 눈 내릴 때면 – 김지하 눈 내릴 때면 – 김지하 이리 눈 내릴 때면 여기면 여기고 저기면 저기지요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안 부를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 당신이지요 나 이제 동백 함께 삽시다 나 이제 사철 함께 삽시다 내일 내 소식 들으세요 부름의 미학 김지하의 시집을 두 권 빌려 후루룩 넘겨보다, 좋아서 고른 시가 이 시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제목에 눈이 들어가는 시이다. 그런지 눈이란 시어가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눈의 고장 강원도 태생이라 그럴 것이다. 허나 눈을 주로 다루었던 전의 시(고은-눈길)와 다르게, 이 시에서의 눈은 단지 겨울이란 시간적 배경만을 제시할 뿐, 별다른 은유가 담겨있지 않다. 이 시가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 이건 친구 커플 이야기인데, 친구 커플이 길.. 더보기
[詩산책] 눈길 – 고은 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눈 나의 고향은 유난히 눈이 많았다. 눈으로 학교 운동장이 가득 덮인 적이 있었다. 그 학교는 아마 서부초등학교가 아닌 서부국민학교였으리라. 눈이 허리까.. 더보기
[詩산책] 詩가 그리운 밤 - 김철성 -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The Postman)』 감상시 - 새벽 4시 詩가 그리운 밤 지금쯤 잠꼬대에나 쓰일 나의 혓바닥으로 오리온 자리에 침을 바르고 싶다면 일 포스티노, 오 나의 네루다 그대의 책임입니다 “아들, 나들이 가자” 아빠 옆자리면 마냥 좋던 시절 구불구불 해안길 따라 출렁거리다 보면 도착하는 동양의 나폴리, 장호마을 마을 어귀 1/4지하 구멍가게에서 나의 아버지 마리오는 막걸리를 산다 서낭나무 아래서 세월을 낚는 신선들의 마음을 산다 사발째 휘휘 저어 돌리다 보면 카아, 소리내며 절로 터지던 구전설화 녹음기는 부지런히 그들의 파도소리를 담는다 새벽 5시 그곳이 그리운 밤 왠지 모르게 문득 어릴 적 할머니가 쪽쪽 빨아준 그때 그 깍두기 맛 물수제비 던지면 기똥차게 날아가.. 더보기
[詩산책] 지는 잎 보면서 – 박재삼 지는 잎 보면서 – 박재삼 초봄에 눈을 떴다가 한여름 뙤약볕에 숨이 차도록 빛나는 기쁨으로만 헐떡이던 것이 어느새 황금빛 눈물이 되어 발을 적시누나. 나뭇잎은 흙으로 돌아갈 때에야 더욱 경건하고 부끄러워하고, 사람들은 적막한 바람속에 서서야 비로소 아름답고 슬픈 것인가. 천지가 막막하고 미처 부를 사람이 없음이여! 이제 저 나뭇잎을 우리는 손짓하며 바라볼 수가 없다. 그저 숙이는 목고갯짓으로 목숨은 한풀 꺾여야 한다. 아! 묵은 노래가 살아나야 한다. 지는 대학생활 보면서 아침에 일어날 때면 어김없이 창틀 사이로 한기가 밀려온다. 날이 제법 추워졌다. 아니, 엄청 추워졌다. 초겨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만한 늦가을이다. 오래 입으려고 샀던 야상은 금방 옷장에 넣을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집에서 보내.. 더보기
[詩산책] 꿈은 깨어지고 – 윤동주 꿈은 깨어지고 – 윤동주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幽霧유무에서 노래하던 종달이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 날 봄타령하던 금잔디 밭은 아니다. 塔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塔탑이-. 손톱으로 새긴 大理石塔대리석 탑이- 하루 저녁 暴風폭풍에 餘地여지없이도 오- 荒廢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塔탑은 무너졌다. Once upon a dream 이 시를 보고 딱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인터넷에서 음악을 찾아 숙제와 같이 제출하고 싶었지만, 요즘엔 불법 다운로드를 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가사를 보며 대리만족을 해보자. Once upon a dream 언젠가 꿈 속에서 I was lost in love’s embrace 난 사랑의 품 안에서 길을 잃었어요 There I found a perf.. 더보기
[독서칼럼] - 3. 현대의 교양론(2) 에고, 항상 글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분량 조절하기란 쉽지 않네요. 결국 이번 칼럼도 기존 예상을 넘고 2부작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세요. 자, 그렇다면 하던 얘기를 마저 해볼까요? 스포츠처럼 테크닉을 중시하는 현대적 교양이란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자인 다치바나가 설명하는 '현대 사회의 교양으로서의 네 가지 지적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론을 세울 수 있는 능력 논리력 / 표현력 / 잘못된 논리를 간파(반박)하는 능력 /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 2.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 계획 수행 능력 / 다른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 / 팀을 만들 수 있는 능력 / 팀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 3. 정보 능력 정보를 수집, 평가.. 더보기
[독서칼럼] - 2. 현대의 교양론(1) 참고: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다치바나 다카시 저/ 이정환 역 2010년 2학기가 시작된지도 어느덧 열흘이 지났습니다.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여름방학을 즐기다 보니, 등교길에 들고 있는 책가방이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닐 겁니다. 아직 익숙치 않은 시간표를 손에 들고 학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겠지요. 수강시간표는 사실 방학 끝무렵 고민의 흔적입니다. 전공수업이야 뻔할 뻔 자니 넘어가고, 교양수업을 어떤 걸 들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많이 듣고 싶어도 다 들을 수는 없고, 들을 게 없어 안 듣자니 그래도 들어야 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일정 학점 이상 수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죠. 전공과목을 정해진 양만큼 수강해야 한다는 건 납득이 가죠. 그런데 왜 대.. 더보기
[독서칼럼] - 1. 나의 독서습관 이번 칼럼에선 저의 독서습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독서를 하시는 분들이라면, 스스로 꽤 여러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 경우에도 개인적인 독서습관을 많이 가지고 있죠. 가령, 평전을 즐겨 읽는다던지, 감성문학을 선호하지 않는다던지 하는 것은 분야별 선호도의 차이이구요. 딱딱한 의자보다는 푹신한 쇼파에서, 책상이 있는 곳보다는 없는 곳에서 읽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런 것들도 독서 습관에 해당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이번에 소개하려 하는 제 독서습관은 이런 개인적인 취향의 것이 아닙니다. 각자 다양한 독서취향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익히면 좋은, 보편적인 독서습관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1. 목표량을 설정합니다 목표량을 정하.. 더보기
[독서칼럼] - 0. 독서와 공유, 시작. 안녕하세요. 김철성입니다. 매일 짜증지수를 높이던 땡볕더위가 영원할 줄만 알았더니, 이제는 에어콘 없이도 제법 버틸만 하네요.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책을 읽고 계신가요? 사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요. 여름동안 더워서 놀고, 방학이라 놀고, 놀다보니 놀고 하다보니, 책을 펼쳐들었던 날이 손에 꼽힙니다. 요즘엔 또 책이 재밌습니다. 개강할 때가 다가와서인가 보네요. 책을 자주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니 그것을 적어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독후감은 진부하죠.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파악하는 흐름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전반적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독서습관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며, 읽는 이의 독서능력을 파악하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