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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산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0.

필자는 학교와 집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계로 거의 분기마다 한 번씩 가족들을 만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럴 땐 보통 집안 행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 주말에는 서울에서 삼촌뻘 되는 친척의 결혼식이 열렸다. 새신랑이 가까운 친척이라 동해바다를 지척에 둔 고향의 친척들도 모두 올라갔다. 거리가 먼 관계로 친척들은 결혼식 전날에 모였고, 필자도 할 일을 마치고 서둘러 상행선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실 따지자면 할 일을 마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업무들을 동료들에게 위임하고 왔기 때문이다. 원래는 다 마치고 올라가야 했던 것인데, 어머니의 성화가 없었다면 아마 당일 새벽기차를 이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 한 켠은 찜찜했지만, 문어를 초장에 찍어 따끈한 사골국물과 먹다 보니 이내 올라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철성아, 왜 이리 삐쩍 말랐누.” , 학기 중엔 항상 듣는 말이다. 이상하게 학생식당 밥은 먹고 나서 금방 배가 고파지는데, 분명 밥알 안이 텅 비어있으리라 필자는 확신해본다. “아들, 너 눈가에 주름 생긴다.” 어라? 이건 뭔 소리야? 원래 학기 끝날 때쯤에 피부가 좀 푸석해지긴 한다만, 눈가에 주름이라니! 아직 파릇파릇한 23인 내가! 내가 주름이라니!

 

2.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고 아버지와 목욕탕을 다녀왔다. 아버지의 배가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그래도 지난 번 추석 때보다는 줄어든 듯 보였다. “요새 좀 걸었더니 효과가 있네.” 아버지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하셨다. “너도 안 나올 것 같지? 나이 들면 다 나와.”

 

3.

목욕탕을 다녀 오니 친척집안은 결혼식 갈 준비가 한창이었다. 할머니는 빠알간 빛 한복으로 갈아입으셨는데, 한복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그 옷은 참으로 고왔다. “이거 네 엄마가 시집올 때 입었던 건데, 나한테 맞아서 내가 입었다. 잘 어울리지?” 식장에서도 할머니는 옷이 마음에 들으셨는지 자신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하셨다. “야야, 이렇게 예쁜 옷 입었을 때 핸드폰에 사진 하나 박아 다().” 그 모습 그대로 배경화면에 담아드리자, 할머니는 온 식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셨다.

 

4.

결혼식을 시작하기 전에 리허설 비슷한 것을 하는데, 직원들이 새신랑에게 이런저런 사항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새신랑은 기분 좋은 듯 하면서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멀리서 봐도 그는 머리숱이 적고 주름이 좀 있었다. 나이 마흔에 가는 늦은 장가였는데, 자신의 할 일에 열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골드미스터라고 불러야 하나.

 

5.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해갔다. 필자와 무관할 것 같았던 주름이란 단어는 어느 새 내 귓가에 다가왔다. 필자와 같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던 아버지는 배가 나왔다. 어머니가 고운 한복을 입고 시집오신 지 25년이 지났다. 어릴 적 우상으로 삼던 친척 삼촌은 생각해보니 지금 필자 나이쯤 먹었었는데, 미혹되지 않을 나이에 사랑에 혹해 결혼을 한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내 탱탱한 피부와, 아버지의 배와, 어머니의 한복과, 그 한복을 입은 할머니와, 새신랑의 늦깎이 사랑까지. 밤꽃이 지면 더 이상 사랑할 시간이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밤꽃향기의 유혹은 말해주고 있다.


2010. 12. 9. / 카이스트에서... (http://김철성.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