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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카테고리/[詩산책]

[詩산책] 눈길 – 고은

눈길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나의 고향은 유난히 눈이 많았다.

눈으로 학교 운동장이 가득 덮인 적이 있었다. 그 학교는 아마 서부초등학교가 아닌 서부국민학교였으리라. 눈이 허리까지 왔기 때문이다. 나와 내 동생이 눈 위를, 아니 정확히 말해 눈 사이를 걷다 보면, 발자국으로 생기는 눈길과는 차원이 다른 눈 통로가 생겼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통로를 흐트러뜨릴까 두려워 팔을 갈매기 날개마냥 어깨위로 파닥이며 걸었다. 한참을 걸으면 앞부분만 눈가루가 덕지덕지 붙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철없는 나이에도 이 모습이 우스꽝스럽단 것을 알았는지, 등짝도 똑같이 하얗게 만든답시고 동생과 나는 손을 잡고 철푸덕 드리누워버렸다. 욱 뽀두두둑. 밑도 끝도 없이 쑥 들어간다. 눈 위가 아닌 눈 속에 눕는 꼴이다. 나의 볼 위로 솟아오른 눈 절벽은 원통망원경처럼 하늘을 비춘다. 그리고, 어두워진다.

눈이 많이 온 날이면 눈 절벽은 더욱 높아지고, 나의 어둠은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더욱, 편안해진다. 셋의 관계는 정비례이다. 눈 속에 가만히 누워있노라면 옆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늘만 보인다. 예로부터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이니,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버지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원초적인 평화이다.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을수록 어둡고 편안하다.

다른 말로 그것은 포근함이다. 사람들은 눈을 보면 포근함을 느낀다. 이런! 36.5도의 정상적 체온을 지닌 사람이라면 영하의 눈을 바라보며 포근함을 느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한가? 이런 비과학적인 망상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가?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이 아니다. 폭설이 내리면 운전자들 입에선 욕설이 터져나오고, 찔끔찔끔 내리는 눈은 첫눈이 아니고서야 뭔가 허전하다. 가장 사랑받는 눈은 따로 있다. 밟았을 때 뽀드득 하고 소리가 날 만큼 적당한 함박눈은 겨울철 최고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정도 내리는 함박눈은, 세상의 모든 과오를 덮기에 충분하다. 불신도, 분노도, 세상의 찌든 때도, 눈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모두 감싼다. 분명 금방 녹아버릴 유토피아지만, 찰나이기에 사람들은 더욱 농도짙은 행복을 느낀다. 눈은 모든 것을 용서하기에 사람들은 그 속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 빨리 첫눈 왔으면 좋겠다.

 

2010. 11. 25. / 카이스트에서... (http://김철성.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