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릴 때면 – 김지하
이리 눈 내릴 때면
여기면 여기고 저기면 저기지요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안 부를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 당신이지요
나 이제 동백 함께 삽시다
나 이제 사철 함께 삽시다
내일 내 소식 들으세요
부름의 미학
김지하의 시집을 두 권 빌려 후루룩 넘겨보다, 좋아서 고른 시가 이 시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제목에 눈이 들어가는 시이다. 그런지 눈이란 시어가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눈의 고장 강원도 태생이라 그럴 것이다. 허나 눈을 주로 다루었던 전의 시(고은-눈길)와 다르게, 이 시에서의 눈은 단지 겨울이란 시간적 배경만을 제시할 뿐, 별다른 은유가 담겨있지 않다.
이 시가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 이건 친구 커플 이야기인데, 친구 커플이 길을 가고 있었다. 여자가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나의 어디가 좋아?’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냥 너라서 좋아.” 아, 정말 친구지만 듣는 순간 손발이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어 버렸다. 그 친구의 여친님도 분명 조금이라도 오글거림을 느꼈을 테지만, 허나 얘기를 듣자니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이 뻔하고도 오글거리는 멘트를 좋아하다니! 역시 여자란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다.
흔히 막걸리는 비오는 날에 땡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뭐, 소주가 땡긴다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하튼 나는 오히려 눈이 살랑살랑 내리는 날이면 막걸리가 생각난다. 그리고 술상대로는 연인도 참 좋겠지만, 친구 놈도 여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런 날에 부르고 싶은 친구는 똑똑한 놈도, 돈 많은 놈도 아니다. 이런 날 막걸리 생각나듯 반사적으로 그냥 생각나는 그런 친구다. 불러놓고 여느 때처럼 야한 농담따먹기나 드럽게 웃긴 얘기들로 농지껄을 하다가, 문득 그 놈 얼굴 쳐다보며 불러본다. “친구야.”
살다 보면 알게 되는 사람 참 많다. 요새 트위터를 하면서도 동갑내기들을 많이 알게 되어 편히 말하면서 안부도 묻고 하는데, 혹자가 누구냐 물어본다면 난 ‘인터넷에서 만난 동갑내기들’이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그래도 오프라인에서의 동갑내기들은 누군가 물어볼 때 ‘친구’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마주보고 있을 때 장난기 하나 없이 “친구야” 라고 직접 불러볼 수 있는 이들은 따로 있다. 그들이 내 친구이다. 말할 때 성대가 열리듯, 마음이 열리는 순간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진정한 ‘무언가’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당신이라 부른다.
2010. 12. 2. / 카이스트에서... (http://김철성.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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